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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의 기억」 (잊혀진 골목에서 피어나는 이야기)

by crawdads 2025. 2. 28.

안채윤 서촌의 기억
서촌의 기억

1. 도시의 흔적 속에서 찾은 기억의 조각들

서울의 오래된 골목을 걸을 때면, 벽돌 하나, 담장 너머로 보이는 창문 하나에도 시간이 깃들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안채윤의 서촌의 기억은 그런 공간에 담긴 이야기들을 섬세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서촌은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동네로, 오래전부터 예술가들과 평범한 서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온 곳이다. 하지만 현대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점차 옛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이 책은 서촌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 개인의 기억과 역사적 사건,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교차시키며 잊혀가는 공간의 의미를 되새긴다. 저자는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서, 그곳에서 스쳐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 오랜 세월 동안 쌓여온 감정과 추억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2. 골목을 따라 흐르는 삶의 이야기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서촌의 좁은 골목을 거닐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저자는 실제로 존재했던 공간과 가상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엮어, 한 동네가 품고 있는 다층적인 서사를 보여준다. 가령, 한때는 시끌벅적했던 세탁소가 이제는 조용한 갤러리로 바뀌었지만, 그곳을 지나던 사람들의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다.

책 속에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평생을 살아온 노부부, 오랜 세월을 거쳐도 변하지 않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만나던 연인, 그리고 한때는 문인과 예술가들의 아지트였지만 이제는 관광지로 변해버린 작은 찻집의 주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저자는 이들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내며, 공간과 기억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서촌이 지닌 예술적 분위기와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담겨 있다. 예술가들이 한때 머물렀던 자리에는 이제 새로운 카페와 상점이 들어서고, 오래된 골목은 젠트리피케이션의 바람을 맞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저자는 '과거의 흔적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 기억마저 사라지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3. 사라지는 것들, 그러나 남아 있는 것들

서촌의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그리워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변화하는 도시 속에서도 어떤 기억은 남아 있고,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묻는다. 오래된 것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 공간이 완전히 잊히는 것은 아니며,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책을 읽다 보면 한 장소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떤 이는 그 길을 지나며 꿈을 키웠고, 또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을 남겼으며, 누군가는 그곳에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기도 했다. 공간과 기억이 얽히면서, 서촌이라는 동네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로 다가온다.

저자의 문장은 서정적이면서도 담담하다. 감상에 빠지기보다는, 독자가 직접 서촌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도록 섬세한 묘사를 이어간다. 덕분에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내가 그 거리를 걸으며 오래된 벽에 손을 얹고, 익숙한 냄새를 맡는 듯한 기분이 든다.

추천하는 이유

서촌의 기억은 단순한 동네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과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기억, 그리고 변화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도시가 빠르게 변화하며 익숙한 골목이 낯선 곳으로 변해가는 시대에, 이 책은 우리가 지나쳐온 공간에 대한 애정을 다시금 일깨운다. 서촌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깊은 공감을 느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잊혀가는 공간과 기억들을 떠올리며 책장을 넘기게 될 것이다.

책을 덮고 난 후, 아마도 당신은 자신이 오랫동안 지나온 골목길을 다시금 돌아보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거리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으며, 그 기억들이 쌓여 도시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가고 싶다면, 서촌의 기억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 책은 단순히 공간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결을 담고 있는, 따뜻한 기억의 조각들이다.